즐거운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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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황동규(1938~ )
 

/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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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편지’는 황동규 시인의 데뷔작으로 20살에 현대문학지에 발표했다. 약관에 이런 시를 썼다는 사실이 놀랍다. 작가마다 차이가 있긴 하지만 세계적 명작은 대체로 청년·중년기에 창작된다. 문학이 인생을 다루는 만큼 쓴맛 단맛 다 본 장·노년기에 이르러서야 좋은 작품이 나올 것으로 보통 생각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이런 것으로 미루어 예술의 본질은 장인론(匠人論)이 아니라 영감론(靈感論)에 더 가깝지 않나 싶다. 다시 말해 창작 행위는 의식적인 노력이나 연구라기보다 통제되지 않는 어떤 힘의 작용이라는 것. ‘즐거운 편지’는 영화 ‘기쁜 우리 젊은 날’에서 낭송되어 대중의 사랑을 받았고, ‘8월의 크리스마스’ 원래 제목도 이것이었다.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라는 진술은, 사랑 또한 일상성의 범주 안에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지겹다고 표현한다. 반복되는 업무, 언제나 같은 음식, 매일 만나는 사람들, 새로울 것 하나 없이 반복되는 일상은 차라리 비참하다고 표현하는 게 낫겠다. 일상을 벗어나 태평양을 건너 낯선 대륙을 여행해도 권태로운 일상성은 집요하게 달라붙는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인간의 삶에 일상성이 사라지면 불안이 엄습한다. 일상성은 사소함과 직결된다. 우리가 때때로 지겹다고 표현하는 일상성의 굳건한 지속성. 역설적으로 이것은 산소처럼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최고 가치를 가진다.

약관이었는데 시인은 어떻게 이처럼 일상성과 사소함의 위대성 알았을까.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영감을 받은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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